
비극의 순간을 되돌려 보려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듯 보이고, 하나님의 뜻조차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돌처럼 굳어져 보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을 향해 대담하게 나아간 두 사람의 기도를 놀라울 만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그들은 모두 비극을 막아 보고자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기도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서로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벗(친구)**이라 부를 만큼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 친밀함의 깊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의도를 그들에게 숨기지 않으시는 장면들을 통해 선명히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뜻을,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으로 인해 내리려 하시는 징계의 마음을 하나님은 그대로 털어놓으셨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비극의 의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그 의도를 되돌리기 위한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도와 모세의 기도는 같은 방향을 향했음에도 서로 다른 결론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결과의 차이가 아니라, 중보기도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인간의 응답이 무엇인지 더 깊이 탐구하게 하는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은 이 두 기도의 길 끝이 서로 다른 이야기로 남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비극을 바라보고도, 같은 하나님 앞에 서고도, 왜 그들의 기도는 서로 다른 문을 열었을까요? 그 차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중보기도의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한다는 신비가 조용히 숨겨져 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무엇이었으며, 모세의 기도는 어떻게 달랐는가?
그리고 그들의 간구 속에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가?
의인을 찾았던 아브라함의 기도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마치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에 비친 그 땅은 풍요로 가득했고, 바람이 스치는 언덕마다 생명의 숨결이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햇빛은 그 골짜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강물은 거울처럼 맑아 하늘을 품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기울 만큼, 정말로 하나님께서 손수 빚어 놓으신 정원 같은 아름다움이 그곳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더없이 탐스럽고 완전해 보이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눈부신 아름다움의 표면 아래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어둠이 숨어 있었습니다. 풍요는 타락을 감추는 얇은 장막이었고, 화려함은 죄의 냄새를 덮으려는 마지막 향기와도 같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마음은 이미 메말라 있었고, 탐욕과 교만이 서서히 도성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면 빛나는 정원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죄악의 응달이 곳곳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을 삼켜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 화려함은 곧 사라질 황혼의 빛이었으며, 그 번영은 멸망을 향한 길에 놓인 잠시의 반짝임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낙원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보신 그 속은 이미 어둠의 무게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균열은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으로 향하게 하는 깊은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죄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부끄러움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타락은 오히려 삶을 꾸미는 장식처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인내라는 긴 숨을 내쉬며, 회복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무감각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영혼은 되돌아올 길을 더 멀리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끝내 경고의 선을 넘어, 진노라는 이름의 무게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결론에 다다른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결심을 곧바로 실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조차도 성급히 내리지 않으시는 분—그분의 마지막 자비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정을 실행하시기 전에, 그 땅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아닌, 인간의 눈높이에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감각으로 그 땅을 걸어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두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두르고 있던 존재들이,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거리 한가운데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정말 합당한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걸어보고, 인간의 숨결로 느껴보고, 인간의 눈물 높이에서 바라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마지막으로 살피고 계셨습니다.(창19:21)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내려가는 그 길, 먼지 바람이 이는 황량한 언덕을 지나던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사막의 햇빛은 흔히 환영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곤 했지만, 그날 아브라함의 눈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은 단순한 나그네의 실루엣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으로, 마치 땅 위를 스치는 빛과도 같이 고요하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모습과 발걸음의 리듬을 살폈고, 이내 마음 한구석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경외감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먼지바람 속에서도 그의 걸음은 서두름보다 경배에 가까웠습니다. 그가 그들을 멈춰 세우자,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고요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허리를 굽혀 그들에게 인사했고, 목소리에는 그저 친절한 환대를 넘어선 어떤 깊은 존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다정하게 그들을 자신의 장막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사양하려 했습니다. 길을 재촉해야 한다고, 굳이 폐를 끼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 그들에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환대는 억지나 과장이 아닌, 마치 그들의 피곤함을 어루만지려는 진심 어린 손길처럼 느껴졌습니다.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장막 안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빛이 스며드는 듯한 따스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상을 준비했습니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그녀의 손길은 바쁘면서도 정갈했고, 아브라함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최상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장막 안에 차려진 식탁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환대와 하나님의 임재가 조용히 만나는 자리였고, 땅의 따뜻함과 하늘의 신비가 함께 놓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서서히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환대는 단순히 나그네를 위한 예절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몸짓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이 땅으로 내려왔는지를 조심스럽게 언급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낮은 숨결 같았고, 장막 안의 공기는 한순간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이 방문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향한 길 끝에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놓여 있음을 깨달았으며 이내 깊은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인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아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브라함은 기도의 자리로 한 걸음 더 초대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아브라함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먼 길 떠나보내는 이처럼 조심스럽고 정중한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했습니다. 그는 그저 예의를 다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몇 걸음의 동행이,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고 인류의 구원 역사에 숨겨진 비밀 하나를 열어 보이는 문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물어가는 햇빛은 세 사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바람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하나님의 의도를 조용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침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한 친구에게 비밀을 숨기지 않는 분의 마음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무친 죄악과 그곳을 향한 심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 앞에서 숨을 깊이 들이켰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의 균열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조카 롯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 전체를 삼킬 듯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그는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귀하고 드문 것인지 새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담하고도 독특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악인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의인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주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그의 반문은 한 사람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성품에 대한 절박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제안합니다.
“그 성읍 가운데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주께서 그들을 위해 도시 전체를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음성은 떨림이 있었지만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속 깊은 곳을 더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50명에서 45명, 다시 40… 그리고 30, 20, 끝내는 의인 다섯 명까지 수를 줄여 나갑니다. 그는 마치 간절함으로 한 걸음씩 무릎을 꿇으며, 하늘의 선하심이 땅의 더러움보다 크기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요청 앞에서 단 한 번도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치 “그래, 내가 그러겠다.”라고 답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공의와 자비가 섞여 있는 하나님의 깊은 한숨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그 ‘의인 다섯’조차 소돔과 고모라에는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 지점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새벽녘 붉은 빛 아래로 소돔과 고모라 위에 떨어지는 유황불은 하늘의 침묵 같은 무게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 문득 깨달았을 것입니다.자신의 기도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향하고 있었음을. 왜냐하면—그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사실—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부질없는 외침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의의 성품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성도의 요청을 끝까지 귀기울이시는 인자와 자비의 하나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바로 그 깨달음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실 ‘참된 의인’, 단 한 분의 의로 온 세상을 덮을 구원의 필요를 조용히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죄의 용서를 구한 모세의 기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의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천둥 같은 기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길은 곧 숨이 턱 막히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출애굽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 앞에는 끝없이 넘실거리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로는 애굽의 바로가 분노한 군대를 이끌고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움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돌아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자리.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시간에, 하나님은 홍해의 심장을 가르셨습니다. 거센 물살은 갈라지고, 그 깊은 바다는 마른 땅처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벽 사이를 지나 마치 새벽 길을 걷는 것처럼 조용히, 그러나 두려움과 경외로 가득 찬 마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억압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옮겨가는 출애굽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던 그들 앞에, 또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의 땅, 가나안 앞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믿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거인만 보였고, 그들의 귀에는 두려움의 목소리만 울렸습니다. 결국 믿지 못한 마음이 그들을 약속의 문 밖에 머물게 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40년은 단지 길을 잃은 시간도,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보며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며 하나님이 ‘채우시는 분’임을 알았고, 끝없는 메마른 땅에서 물이 솟구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살리시는 분’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는 동시에 그들의 불신앙이 남긴 상처를 치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믿지 못한 대가, 순종하지 못한 댓가가 모래바람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길이 단지 ‘벗어남’만이 아니라 ‘변화됨’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스럽게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 속에서 모세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하나님의 대변자였고,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는 통역자였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출 33:11).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나눌 수 있는 가장 깊고도 신비한 친밀함의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내려앉았고, 그 안에서는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대화가 오갔습니다. 그 대화는 명령이자 곧 사랑이었고, 꾸지람이자 동시에 위로였습니다.
출애굽한 지 11개월이 되었을 때, 유월절 이후 오십째 되는 날,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름은 단순한 호출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을 새기기 위한 거룩한 초대였습니다. 산정상에는 번개와 구름이 둘러쌌고,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신비와 두려움이 흘러넘쳤습니다. 모세는 마치 하늘의 문턱을 오르는 듯한 심정으로 그 산을 올랐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율법을 돌판에 새겨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옛 애굽의 그림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버리지 못한 애굽의 방식,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오래된 버릇이 다시금 그들을 유혹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모세의 형 아론이 서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둘러싸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을 달라!”
그들의 불신앙은 조용한 속삭임이 아니라 집단의 압력과 위협이 되어 아론을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 앞에서 무너졌고, 그들의 손에서 나온 금붙이들은 녹아내려 한 마리 금송아지로 형체를 갖추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는 빛을 반사하며 황금빛으로 번쩍였고, 백성들은 그 앞에서 춤추며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 여기 있다!”
얼마나 비극적인 광경이었을까요.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을 돌판에 새기고 계셨고, 땅에서는 백성들이 그 언약을 깨뜨리는 우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앞에 엎드린 모습은 단지 신앙의 타락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깊숙이 남아 있던 애굽의 잔재가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서 벗어났지만 애굽은 그들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는 단순한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인간의 오랜 욕망이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더 신뢰하려는 인간의 연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장면 앞에서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대변자로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의 죄 사이에서, 한 손에는 돌판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백성을 위해 중보해야 하는, 영광과 절망의 경계에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광야의 장면은 단숨에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깊은 상흔을 남긴 순간이었고, 동시에 새롭게 펼쳐질 중보의 기도를 향한 거대한 전주곡이었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다시 산으로 올랐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그 절박한 발걸음을 조용히 기록합니다. 모세가 다시 시내산을 향한 목적은 단 하나,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중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도 단호했습니다. 백성의 죄는 이미 그의 눈앞에 붉은 상처처럼 드러나 있었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0–34절은 모세의 간절한 영혼의 울림을 들려줍니다. 모세는 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죄 위에 하나님의 긍휼을 덮어 주시길 구했습니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자신의 존재를 그들의 죄와 함께 내려놓겠다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히 마음을 움직이려는 호소가 아니라, 한 민족을 대신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서는 대속적 사랑의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간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로움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그 책임은 멸망이 아니라 책망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넘어서는 자비와 긍휼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아브라함과 모세의 기도는 또렷한 대조를 이루며 빛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붙들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호소했습니다. 그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는 것은 주님께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에는 의인 다섯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도시의 멸망을 막기에는 그곳의 죄악이 너무 깊었습니다.
반면 모세의 기도는 전혀 다른 결로 흐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죄인임을 인정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기대어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입니다. 죄를 범했으나, 주께서 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러니 멸망이 아닌 자비로 대해 주옵소서.”
모세의 기도는 의인을 찾는 기도가 아니라, 죄인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로움’에 호소했고, 모세는 ‘긍휼’에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성격은 서로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 도시의 죄악 앞에서 무너진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모세의 기도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드러냅니다.
결국 이 두 기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동시에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때로 의로움에 대한 호소일 수 있고, 때로는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는 절박한 중보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기도는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죄와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붙들고 사람을 살리는 기도.
그 기도야말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친구로 불린 이들의 공통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초대를 건넵니다.
비극을 바꾸는 기도, 심판을 멈추게 하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중보의 기도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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